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적색 상황(Fall Rot) - 1940년 6월 == 독일군의 황색 상황으로 연합군이 북동부 전역에서 상실한 제대는 61개 사단에 달했다. 그리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영국군도 탈출하자 연합군의 가용제대는 65개 사단으로 쪼그라든다. 적색 상황 시점에서 연합군의 방위 전선은 965km에 달했기에, 변변찮은 예비대도 없는 프랑스군에게는 돌파된 전선을 메울 병력마저 사치였다. 여기에 프랑스의 민간인들도 대거 피난에 나서면서 연합군은 제대로 된 기동로도 상실한다. 한편 독일군은 142개 사단을 운용하고 있었고, 영국 해협 일대의 제공권까지 틀어쥐고 있었다.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비록 한참 늦었지만 덩게르크를 접수한 B집단군은 해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공세를 속개했다. 하지만 이 시기 독일군의 공세는 예상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군이 내선의 강점을 갖추고 있었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철수했던 10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 병력이 방어선으로 복귀하여 사기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비록 패전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1달간의 실전 경험을 쌓은 장교단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강력히 저항했다. 5월 23일~28일 간 프랑스군은 7군과 10군을 신편하였고, 베이강이 지휘한 고슴도치 전술을 통해 단단한 종심을 갖춘 프랑스군 방어선은 독일군에게 극심한 소모를 강요했다. 독일 B집단군이 파리를 공격하며 입은 손실은 이 시기 프랑스군이 얼마나 선전을 펼쳤음을 보여준다. 에리히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은 재편된 이후 감행한 공세에서 거의 20%에 이르는 장갑차량을 손실했다. 1차대전에서 경험을 쌓은 베이강이 솜 강 일대에 펼친 단단한 방어선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공세는 난항에 빠지나, 독일 공군의 집약적인 운용으로 프랑스의 반격을 상당 부분 봉쇄하였다. 독일은 여전히 전략적 국면에서 승기를 잡고있었다. 프랑스 10군은 결국 손실을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였고, 그만큼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빨라졌다.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무저항도시로 선언했고, 독일 18군은 프랑스군의 파리 방어선을 곳곳에서 돌파했다. 6월 13일, 처칠은 영불 최고작전회의에 참석해 영불연방의 창설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었다. 6월 18일에 이르면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은 셰르부르 항을 점령했고, 이 와중에 아직 철수하지 않았던 영국군 51보병사단의 항복을 받아냈다. 한편 독-프 접경지대의 독일 C집단군은 A집단군을 도와 마지노선 포위를 시작했다. 메츠(Metz) 일대의 요새망을 둘러싸 알자스 일대에서의 반격을 차단하는 게 작전의 목표였다. 구데리안도 시기를 맞추어 베르됭(Verdun) 일대에 편성된 마지노 선을 공격하기로 한다. 6월 15일, 호랑이 작전(Unnternehmen Tiger)이 발동되었고, C집단군은 라인 강을 건너 마지노 선에 대한 정면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마지노 선의 방어력은 역시 무적이나 다름없었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일례로 호랑이 작전 중 마지노 선의 북단에서 벌어진 8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공세로 프랑스군에 발생한 사상자는 '''2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방어선을 방기하고 물러나야 했는데, 마지노 선에 주둔한 병력이 프랑스군이 보유한 마지막 정예 부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C집단군은 깨질걸 알고있으면서도 마지노 선에 공세를 펼쳐 프랑스군을 잡아 놓았고, 그 사이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기갑집단[* 이 시점에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19기갑군단이 기갑집단으로 재편되었다. [[전격전의 전설]]에는 '''기갑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책의 실수로, 독일군은 [[독소전쟁]] 이전에 기갑군을 창설한 바 없다.]은 마지노선의 후방을 가로질러 프랑스 남부로 쾌속진격했다. 6월 17일, 구데리안은 프랑스-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퐁타를리에(Pontarlier)에 도착했는데, 이 진격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독일군 사령부조차도 구데리안의 진격 속도를 믿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이에 호응해 마지노 선을 돌파한 C집단군 예하의 7군이 기갑집단과 연결되며 포위망이 완성되었고, 프랑스 2집단군은 50만 명에 육박하는 포로로 전락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한껏 흥분하여 사진을 찍고 승리를 자축했다. 프랑스 주요 도시를 장악한 독일군 병사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프랑스 정부 기관에서 중요한 정보지들과 문서를 빼간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스파이, 프랑스 안의 유대인들 소재를 파악하고 1919년 독일에게 치욕을 안겨 준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을 즉시 히틀러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본토에 잔류한 영국군은 6월 14일~25일 동안 펼쳐진 아리엘 작전(Operation Ariel)으로 상기한 셰르부르 항 외에도 남은 프랑스 항구를 통해 자유 폴란드 군대나 프랑스 군대 및 수만 명의 민간인들과 함께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